석림단상: 길에 이름표를 달자

이 광근

1997년 [과기원 신문]

과기원안의 모든 길들에 이름을 붙이고, 건물에는 번호를 내달고, 건물이름과 화살표로 춤추는 회색빛 이정표들 대신에 길 이름을 알려주는 작고 푸른 이정표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.

전화는 번호로 되어있는게 무척 다행이다. 하긴 옛날에는 교환에게 자세히 설명했었다고 한다: ``아랫마을 이장집 옆의 구멍가게 있쟎아요, 그 집 뒷 마당네 대주세요.''

지금 과기원의 주소체계나 이정표도 꼭 그 모습이다. 그래서, ``정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오른쪽으로 들어서서 왼편에 두번째 십자형 3층 건물이 보입니다. 전산학과라고 크게 써있고요. 그곳으로 꺾어져 오시면 됩니다.'' 박물관에서 본 구한말 우편봉투에 적힌 주소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.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할수 있지 않을까: ``과기원 카이스트로에서 디지탈 거리로 우회전, 그 거리의 110호 빌딩이 전산학과입니다. 제방은 2429호 이구요.'' 건물에는 이름표와 함께 이쁜 번호가 명확하게 걸려 있을테니 길따라 찾아와서는 번호보고 빌딩을 구분하면 되는 것이다. 새 빌딩이 들어설때마다 그 빌딩 이름으로 이정표를 덧칠하는 번거로움도 없어진다. 이러한 체계적인 주소찾기가 필요할 만큼 복잡하고 빌딩이 많아지고있는 과기원이 아닌가.

얼마전 이것을 원에 건의했더니 계획은 있는것 같으나 진전이 없는모양이다. 학생들이 나서서 가속도를 붙일 수 있지 않을까. 과기원에서 영원히 쓰일 길 이름을 붙이는 것은 1900년대말을 살아가는 우리만이 즐길 수 있는 유희일 것이다.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: 여기는 ``숙제로'', 요기는 ``오버나잇로''. 아니면, 시적인 몽상을 즐길 수 있는 이름들도 상관없으리라: ``가버린 거리'', ``누은 길목''...

열린 과기원은 담장이 헐리고, 마을버스가 캠퍼스를 통과하고, 수위아저씨들이 부드러워지면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,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주소체계를 갖추면서도 한껏 열린다고 믿는다. 내가 몸담고 있는 전산과에서는 종종 세미나 공고에 ``2층 세미나실'', ``득도량앞 강의실'', ``CAIR 회의실''등으로 쓰곤하는데, 기회있을때 마다 방번호를 사용하도록 권고하곤 한다. 우리끼리의 은어가 주소로 사용되면서 안과 밖의 구분이 은연중에 우리를 감싸면, 우리는 공개적으로 틀릴 수 있는 ``과학하는 사람''들이 아니라 울타리안에서 믿어의심치 않는 ``신도''들이 되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. 가장 과학적일 수 있는, 쉽고/활달하고/창의적이고/열려있는 우리가 아닌가.

지난번 민방위훈련 소집공문에 교육장소가 ``교양관 시청각실''이라고만 되어있길래 전화를 걸었다.

``교양관 시청각실이 어디 있는 겁니까?''
``있쟎야여. 교양건물에 있는거여.''
``빨간건물중에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?''
``다 아는디이이.''